이육사 연구 Report
어릴적부터 육사는 총명하여 5세 때부터 11세까지 조부 밑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리고 1915년(12세) 조부가 수장(숙장)이던 예안(예안) 보문의숙(보문의숙)에서 비로소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19 (16세)에 그의 집이 녹전면 신평동으로 이사가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새로운 사건에 접하게 되었다.그것은 기미 독립만세 운동이 예안에서 일어났다. 그후 1921년 18세 영천(영천) 안용낙(안용낙)의 딸 순흥 안씨(순흥 안씨)와 결혼하였고 1923년에 이육사가 대구에 정착한 것은 그의 나이 20세였고 대구는 그의 독립운동의 발판이 되었던 곳이다. 1925년 22세 드디어 육사는 독립운동 집단인 정의부, 군정서 의열단에 입단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이 비밀단체에 그의 3형제인 백형 원기(백형 원기), 숙제 원일(원일)이 한꺼번에 가담했다.
1926년 23세 육사는 대구 조양회관에 신문화 강좌에 참가하고 난 다음 이정기와 함께 북경으로 갔다가 1년만인 1927년 24세에 돌아왔다.
이때 마침 의사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있었다. 여기에 연루되어 그의 3형제가 똑같이 2년 7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29년 26세에 출옥 후 대구에서 조선일보지국을 경영하면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이 해 10월에 광주 학생 사건이 일어나자 또 다시 예비 검속되었다. 이 무렵에 습작한 시를 처음『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제목은「말」이다. 이 시의 특징은 하나도 다른 색채 (민족주의)를 띠지 않고 오직 말에 대한 이미지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첫 시「말」을 발표하고 난 다음 또 다시 육사는 심기일전하여 구국의 길에 나섰다. 육사가 보여준 패기, 불의에 항거하여 몸을 던질 수 있었던 저항은 그의 남다른 유학정신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이 지리적 환경에서 익힌 강인함이다. 특별히 육사가 성장한 고향의 환경은 낙동강의 사시변화로 말미암아 굳건한 뜻을 키워 주었다. 1929년 육사의 외아들이 사망했고 이로부터 구국운동에 힘썼다. 1930년 대구에서 있었던 격문 사건 (격문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32년 조선군관학교에 국민 정부 위원회 간부 훈련반에 입교하고 다음해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을 했다. 1935(32세)은 육사에겐 중요한 해였다. 문학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왔다. 그것이 신조선지와의 관계였다. 민족주의자 위당(위당) 정인보선생과 민세(민세) 안…(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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